사할린동포 독거노인 위한 ‘끝이 없는 봉사’

5년째 사비 털어 김장 담가주고 무료장례 130번 치러준 장례식장 주인
본인은 월세 30만원짜리 ‘사글세 삶’…“삶 자체 봉사인 사람” 평가

미디어다음 / 글, 사진=신효정 프리랜서 기자


매서운 초겨울 바람이 불던 지난 16일.

경기도 안산의 한 공원에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낀아주머니 50여 명이 모여들었다.

공원 한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들은 배추, 무, 고춧가루 등. 김장을 담그기 위한 재료들이다.

이는 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열린 ‘사할린 동포 돕기 김장행사’의 모습. 그런데 김치 담그기에 여념이 없는 아주머니들 사이에 하얀 ‘주방장 모자’를 쓴 한 남성이 보인다.


지난 16일 경기도 안산의 한 공원에 ‘사할린 동포 돕기 김장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그는 사할린동포후원회 회장 오창석(58) 씨다. 오 씨는 올해로 다섯 번째 ‘사할린 동포 돕기 김장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올해 김치 담그기 행사에서는 모두 9000포기의 김장을 했다. 3일씩 세 번에 걸쳐 모두 9일간 이 많은 양의 김치를 담갔다.

동원된 인력은 100여 명. 안산의 새마을부녀회와 참봉사단이 일손을 거들었다.

이 ‘사랑의 김치’는 안산의 고향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사할린 동포 489세대에 가구당 20kg씩 나눠줄 예정이다. 그리고 인근 고아원과 양로원 아홉 곳에도 300~500kg씩 제공된다.

배추 9000포기는 모두 오 씨가 손수 농사를 지은 것이다. 농약 한 번 치지 않은 순수 무공해 배추다. 최근 ‘기생충 알 김치’ 파동 때 배추 값이 급등하자 배추를 훔쳐가는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로 귀한 배추다.

이처럼 대대적인 김치 담그기 행사를 하기 위해 든 비용은 모두 합해 6000만 원 정도. 이 비용은 오 씨가 사비를 털어 마련한 것이다.

오 씨는 “먼 사할린 땅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고국에 돌아온 동포 노인들이 한국에서도 외롭게 여생을 보내고 있다”며 “사할린 동포 노인들이 내가 담근 김치로 밥 한 끼를 맛있게 들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할린 동포 돕기 김장행사’에서 많은 아주머니들이 김치를 담그고 있다.
안산 고향마을은 사할린 동포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70세 이상의 노인들로, 일제강점기 때 러시아로 강제 징용됐던 이들이다.

이들은 일생의 대부분을 사할린에서 보내고, 2000년 2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착한 곳이 이곳 고향마을. 처음에는 971명이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841명만이 남았다. 그동안 130명이 눈을 감았다.

오 씨가 사할린 동포 노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바로 이들 130명의 죽음이었다. 안산에서 장례식장을 운영하고 있는 오 씨에게 피붙이 하나 없는 동포 노인들의 외로운 죽음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사할린 동포 노인들은 장례식은커녕 수의조차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를 보다 못한 오 씨는 이들을 위해 무료 장례를 치러주기 시작했다. 노인들에게 수입을 입혀주고 직접 염을 했다. 외로운 노인들에게 자식 노릇을 한 셈이다.

오 씨는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다가 막상 한국에 온 지 한두 달 만에 고인이 되는 분들을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며 “조금이나마 마지막 가는 길을 돕고자 하다 보니 장례를 치러주게 됐다”고 말했다.

이같이 결코 적다고는 말할 수 없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오 씨는 종종 주위에서 돈이 무척 많아 그 돈을 기부하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오 씨의 형편은 넉넉지 않다. 그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인 집에서 아내와 자녀 4명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늘 하얀 고무신만 신고 다닐 정도로 가난에 익숙하다.

이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오 씨가 남을 돕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은 것은 ‘1만 원이 생기면 1만 1000원을 봉사하는 데 써야 한다’는 그 자신의 고집, 또는 철학 때문이라고 한다.


사할린 동포를 돕기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오창석 씨. 16일 그는 동포 노인들을 위한 김장을 하기 위해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바쁘게 일했다.
오 씨는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 씨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사망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를 한국에 버려둔 채 일본으로 떠났다.

어린 나이에 홀로 한국에 남게 된 오 씨는 거지, 건달, 노숙자 생활을 하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간신히 유년시절과 성장기를 보냈다.

당연히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오 씨의 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 중퇴다. 그는 “어렸을 때 힘든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어려운 이웃들이 남 같지 않다”며 “배고파 본 사람이 배고픈 사람 심정을 더 잘 아는 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사할린 동포들을 돕기 전에도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해왔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두고 “삶 자체가 봉사인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다.

오 씨는 무의탁 노인을 위한 시설을 운영하기도 했었고, 음성 꽃동네에 수년 동안 모두 900여 벌의 수의를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지난 97년에는 신장 질환을 앓고 있던 생면부지의 고등학생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해 한 생명을 살렸다. 오 씨는 또 장기기증운동본부에 간과 골수를 기증하겠다는 신청도 해 놓은 상태다.

이런 오 씨의 삶을 지켜보는 가족의 마음은 편할 날이 없다. 오 씨의 장녀 영미(29) 씨는 “솔직히 불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라면서 “아버지 자신도 힘들 텐데 남의 일까지 다 떠안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속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영미 씨는 “그렇지만 아버지의 봉사하는 삶을 보면서 가족들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됐다”며 “지금은 가족 모두 아버지의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 씨는 최근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사할린동포후원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후원회를 사단법인화 해야 정부에 더 강력하게 사할린 동포 지원 정책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씨는 “아직까지 사할린 동포를 지원하는 제도가 없어 동포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지금 사할린 동포를 지원하는 법안이 국회에 상정된 상태인데 꼭 통과돼서 사할린 동포 지원 대책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도 아픈 과거를 딛고 고향 땅을 찾은 사할린 동포를 돕는 후원회를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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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ed by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Posted by 신효정
재소자에게 보낸 수천 통 편지…“결국 나를 변하게 해”
8년째 감옥으로 편지 쓰는 사람 강지원 인터뷰, “편견 버리고 그들을 바라보세요”
미디어다음 / 신효정 프리랜서 기자
“재소자들도 알고 보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편견을 버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봤으면 합니다.”

지난주 미디어다음과 만난 ‘편지 쓰는 사람들’(편쓰사, www.letterpeoples.com) 대표 강지원(37, 여, 사진) 씨는 재소자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편견이 섭섭한 듯 이같이 말했다.

언뜻 연약해 보이는 몸에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강 씨지만 사람들이 재소자들에게 근거 없는 오해를 품고 있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말투였다.

이처럼 강 씨는 재소자들을 ‘편애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도 그럴 만했다. 강 씨가 재소자들을 벗 삼아 보낸 시간이 어느덧 8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강 씨와 재소자들을 이어준 다리는 한 장의 편지. 강 씨가 교도소 담장 너머로 띄워 보낸 편지의 수는 강 씨 자신조차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아마 수천 통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편지 때문에 재소자와 함께 웃고 울어본 때도 수십 차례다. 이같이 재소자들과 남다른 인연을 맺으며 살아왔지만 사실 그 시작이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았다고 강 씨는 말한다.

재소자와 이어준 다리, 한 장의 편지
자신만 생각하던 삶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삶으로…
올해 초 한 재소자가 ‘편쓰사’ 회원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편지지 30장을 이어 붙였다. 당시 재소자는 하루에 세 통밖에 편지를 쓸 수 없는 교도소 내부 규칙이 사라지자 기쁜 마음에 긴 편지를 썼다고 한다. [사진=편쓰사]
“1998년부터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졌어요. 그러다보니 자주 누워있게 됐고,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죠. 그러다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결심을 했어요.”

지금과는 다른 삶. 강 씨에게 그것은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타인을 함께 보듬는 삶을 의미했다.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던 삶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삶으로, 강 씨는 번쩍 자신의 삶을 ‘들어’ 옮겼다.

이런 강 씨가 외로운 사람들에게 편지 쓰는 일을 자신의 일로 택한 것은 그야말로 강 씨다운 결정이었다. 그는 이 일이 여러 봉사활동 중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편지 쓰기라면 자신의 적성과 꼭 맞는 일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과감하게 강 씨는 자신의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한 잡지에 ‘편지를 보내드립니다’라는 ‘이상한’ 광고를 냈다.

“물질적으로 하는 봉사보다도 마음이 외롭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잡지에 광고를 냈는데, 의외로 재소자 분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죠.”

물론 강 씨에게도 처음 재소자에게 편지를 보낼 때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이 사람에게 어떻게 들릴까. 과연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이 사람들도 공감할까.”

하지만 다 기우였다. 편지를 주고받으면 주고받을수록 강 씨는 재소자들도 모두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며 똑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이런 평범한 진실을 깨달아가는 동안 강 씨에게 배달돼 오는 편지는 점점 늘어만 갔다. 어느덧 재소자 100여 명이 강 씨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재소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기우였을 뿐
함께 편지 쓸 사람들 모았지만 재소자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
‘편지 쓰는 사람들’ 홈페이지 화면. [www.letterpeoples.com]
“아무래도 혼자서는 100여 명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낼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함께 재소자에게 편지를 쓸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이게 훗날 편쓰사가 됐죠.”

편쓰사의 모든 편지는 개인 주소가 공개되지 않고 사서함만을 통해 전달된다. 편지를 보내는 횟수는 각자 사정에 따라 조절된다. 대개 회원 한 명이 재소자 2명 이상과 연결돼 한 달에 2회 정도 편지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강 씨는 “이 정도 횟수로 편지를 써서는 재소자들의 편지에 원활하게 답장을 하며 모임을 운영해 나가기 힘들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또 회원 수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한다.

편쓰사의 회원 수는 99년 당시 700여 명이었으나 요즘은 20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 강 씨는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자필로 편지를 쓰는 것을 귀찮아하는 탓에 회원 수가 줄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강 씨는 그러나 재소자들의 편지는 나날이 늘어나고만 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재소자들한테서 편지가 많이 올 때는 한 달에 수천 통까지 온다고 한다.

강 씨는 세상은 빠르게 변하지만, 함께 변해가지 못하는 교도소 담장 너머의 재소자들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또 일일이 답장을 쓸 수도 없는 형편에 재소자들의 외로움만 더 짙게 느껴져 항상 마음이 무겁다.

세상은 변하지만, 함께 변해가지 못하는 재소자들
누군가 관심 가져준다는 안도감이 재소자 변하게 하는 원동력
“간절히 편지를 기다리는 재소자 분들께는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편쓰사 회원들이 일상생활도 포기해가며 편지만 쓰는데도 답장을 못 받는 재소자 분들이 대다수니 정말 안타까워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7살과 5살짜리 어린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강 씨에게 육아와 일상생활, 편지 쓰는 일을 병행하는 것은 때때로 버겁게 느껴진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지칠 때는 이 일을 시작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후회를 한 번도 안 해봤다면 거짓말이겠죠. 하루 종일 편지 쓰는 일에만 매달려야 할 때도 많았으니까요. 정말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강 씨가 결코 이 일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간절히 편지를 기다리는 재소자들이 편지를 받았을 때 느낄 기쁨과 희망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딘가에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있다는 안도감. 이런 작은 안도감이 재소자들로 하여금 꾸준히 자신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게 강 씨의 신념이다.

“입버릇처럼 사는 게 고통스럽다고 하던 한 재소자가 어느 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편지를 보내왔어요. 앞으로 더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도 하면서요. 순간 더 열심히 편지를 써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죠.”

강 씨는 요즘 앞으로 활동의 범위를 넓혀 재소자들이 출소 뒤에도 재범을 저지르지 않고 사회에 잘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적인 재활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재소자들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결국 재소자들을 하나둘 변화시켰듯이, 자신만 생각하던 삶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삶으로 번쩍 자신을 ‘들어’ 옮긴 뒤 강 씨 자신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 한 재소자가 ‘편쓰사’ 회원에게 보낸 편지. 이 재소자는 폭력죄로 10년 넘게 수감 생활을 한 뒤 사회로 복귀해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10년 넘는 수감생활을 마치고 사회에서 힘겨운 적응기간을 거치고 있는 한 친구가 오랜만에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작은 아파트에서 연고도 없는 소년원 출신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침마다 자신은 정비기술 학원에 가고, 아이들은 검정고시 학원에 보내느라 정신이 없답니다. 도시락도 4개나 싸야 한다고 했습니다.

친구는 수감 중에 입버릇처럼 하늘이 온통 회색빛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네가 회색 눈을 가졌으니 그렇다”고 말하는 제게 그 친구는 “그러면 너는 파란색 눈을 가졌냐”고 물었습니다. 파란색은 희망이라면서요. 저는 “회색과 파란색 눈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답했지요. 다만 눈이 회색 눈이 됐을 땐 하늘을 안 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습니다. 회색 눈으로 봐야 회색빛 하늘만 보일 테니까요.

친구는 교도소에 있을 때 자주 독방에서 생활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만도 열여섯 차례가 넘지요. 두 달쯤 독방 안에 있으면 친구는 정말 부지런히, 부지런히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한때는 독방에서 나올 때까지 제 편지를 한두 통 받으려니 생각했었는데, 벌써 30통이나 받았다며 좋아하더군요. 무슨 ‘엄마의 기원’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파란색 눈만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그 친구가 이제 어엿한 정비사가 돼 있습니다. 정말 당당하고 씩씩하게 사회의 보통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꿈을 이룬 것입니다. 또 함께 지내는 소년원 출신 아이들도 곧 검정고시를 본답니다. 친구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아이들을 꼭 대학까지 보내 공부시킬 거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지요. 그 친구가 ‘편쓰사’ 분들에게 전해달랍니다. 편쓰사 가족들이 보내준 사랑, 평생을 바쳐서 보답해드리겠다고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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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ed by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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